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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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상남 댓글 0건 조회 2,796회 작성일 09-05-01 04:14본문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
물질만능주의와 풍요로운 문화적 배경을 타고 성장한 신세대들은 모르리라.
그 시절 그 시대 암울하고 처참한 환경의 빈곤의 늪을 헤매며 초. 중등시절을 보냈던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던 극심한 경제사정하의 빈곤의 악순환을 아는가?
아마도 지금의 사정에서 국외로 눈을 돌려보면 중국의 변두리에 소재한 빈민가나 북한주민의 생활상이 그 당시 우리의 생활상과 흡사하지 않을까싶다.
척박한 땅의 조악한 농업경제에 기반을 두고 생활을 영위해온 농가에서 성장하여 초. 중등과정을 보낸 나는 거의 1일 2식을 먹고 자랐던 추억이 아련하다.
물질이 풍요해진 요즘에도 나는 거의 습관상 아침을 생략하는 관계로 실상은 하루에 2식을 하는 꼴이지만 그래도 지금은 오랫동안 지속된 식생활 습관이나 체중조절 등의 의도적인 목적으로 취식을 절제한 결과이고 당시처럼 식욕이 왕성한 성장기에 먹고 싶어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야하는 사정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도 다소 부유하거나 여유 있는 집에서는 점심때 도시락을 준비하거나 집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수도 있었는데 나는 극빈한 생활경제로 이도 허용되지 않아 약 12년을 점심을 거르고 지냈다. (초등 6년, 중학3년, 고등3년)
그 당시 어렸웠던 시절의 추억을 일거에 나열하여 설득할 자신이 없지만 특히 기억에 사무치는 기억이 떠올라 소회를 적어본다.
아마도 초등학교 3-4학년의 무렵인데 중식 때 급식을 보조하는 정부시책에 따라 옥수수가루로 떡을 찧어서 소사가 교실을 돌며 큰 알루미늄의 다락에다가 칼로 구획을 그어 학생 수에 맞추어 하나씩 차례로 배분하였는데 둥근 다락에서 찧어 칼로 구획하다보니 자연 모서리부분은 다른 중간부분에 비해 그 크기가 작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운이 좋은 사람은 중간부분을 차지하게 되지만 모서리부분을 배분받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약간 적기 때문에 서로 다락을 책상에 올려놓는 순간부터 가운데분분을 차지하려다가 알밤을 맞던 일이 있다.
또한 흔히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는 말처럼 나의 가족상황은 6남매인데 당시는 경조사 시에 상호부조정신에 기한 미풍양속에 따라 이웃집에서 음식이나 떡을 나누는 관행이 성행하였는데 이웃집에서 떡이라도 가져오면 부모님이 입회하에 공평하게 똑 같이 인원수에 비례하여 나누어 먹는데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시기인데다가 워낙 흡족하지 못한 소량이라 흔히 “간에 기별도 안가는 정도”라서 서로 더 먹으려고 또는 꼭 같이 나누었는데도 형이나 누이가 차지한 것은 어찌 그리 커 보이는지 서로 아귀다툼의 전쟁을 치루었던 기억이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오죽했으면 잠을 자다 꿈속에서도 재현되어 형이 내가 들고 있는 떡을 빼앗아 달아나니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은 상태에서 “내 떡 줘! 감자...감자..줘 내 감자 내놔” 식은땀과 함께 허언을 하니 부모님께서도 병적으로 홍역을 치루는 것으로 생각되어 매일 밤 준비했다가 자다가 깨서 울면 하나씩 쥐어주던 모정이 그리워진다.
이렇게 지난날 어렵고 참혹한 생활환경에서 주경야독을 하면서 (고교과정 3년과 졸업 후 서울에서 2년) 눈물 젖은 빵으로 겨우 청소년기를 보내다보니 영양이 고갈되어 성장이 멈추게 되어 지인이나 친지들로부터 나에 대한 별칭으로“괴물(怪物)”,또는 “분재(盆栽)”라는 호칭으로 회자되기도 하는 부끄러운 빈곤의 산물인 사연을 갖고 있기도 하다.
당시의 사정이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의 일이었으니 강산이 변해도 3번이나 변하여 한세대가 흘러가고 새로운 세대가 열리는 구획이니 타임머신을 타고 훌쩍 지옥과 천당을 배회하는 몽상의 흔적처럼 격세지감의 감회가 아련하다.
물질만능주의와 풍요로운 문화적 배경을 타고 성장한 신세대들은 모르리라.
그 시절 그 시대 암울하고 처참한 환경의 빈곤의 늪을 헤매며 초. 중등시절을 보냈던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던 극심한 경제사정하의 빈곤의 악순환을 아는가?
아마도 지금의 사정에서 국외로 눈을 돌려보면 중국의 변두리에 소재한 빈민가나 북한주민의 생활상이 그 당시 우리의 생활상과 흡사하지 않을까싶다.
척박한 땅의 조악한 농업경제에 기반을 두고 생활을 영위해온 농가에서 성장하여 초. 중등과정을 보낸 나는 거의 1일 2식을 먹고 자랐던 추억이 아련하다.
물질이 풍요해진 요즘에도 나는 거의 습관상 아침을 생략하는 관계로 실상은 하루에 2식을 하는 꼴이지만 그래도 지금은 오랫동안 지속된 식생활 습관이나 체중조절 등의 의도적인 목적으로 취식을 절제한 결과이고 당시처럼 식욕이 왕성한 성장기에 먹고 싶어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야하는 사정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도 다소 부유하거나 여유 있는 집에서는 점심때 도시락을 준비하거나 집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수도 있었는데 나는 극빈한 생활경제로 이도 허용되지 않아 약 12년을 점심을 거르고 지냈다. (초등 6년, 중학3년, 고등3년)
그 당시 어렸웠던 시절의 추억을 일거에 나열하여 설득할 자신이 없지만 특히 기억에 사무치는 기억이 떠올라 소회를 적어본다.
아마도 초등학교 3-4학년의 무렵인데 중식 때 급식을 보조하는 정부시책에 따라 옥수수가루로 떡을 찧어서 소사가 교실을 돌며 큰 알루미늄의 다락에다가 칼로 구획을 그어 학생 수에 맞추어 하나씩 차례로 배분하였는데 둥근 다락에서 찧어 칼로 구획하다보니 자연 모서리부분은 다른 중간부분에 비해 그 크기가 작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운이 좋은 사람은 중간부분을 차지하게 되지만 모서리부분을 배분받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약간 적기 때문에 서로 다락을 책상에 올려놓는 순간부터 가운데분분을 차지하려다가 알밤을 맞던 일이 있다.
또한 흔히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는 말처럼 나의 가족상황은 6남매인데 당시는 경조사 시에 상호부조정신에 기한 미풍양속에 따라 이웃집에서 음식이나 떡을 나누는 관행이 성행하였는데 이웃집에서 떡이라도 가져오면 부모님이 입회하에 공평하게 똑 같이 인원수에 비례하여 나누어 먹는데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시기인데다가 워낙 흡족하지 못한 소량이라 흔히 “간에 기별도 안가는 정도”라서 서로 더 먹으려고 또는 꼭 같이 나누었는데도 형이나 누이가 차지한 것은 어찌 그리 커 보이는지 서로 아귀다툼의 전쟁을 치루었던 기억이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오죽했으면 잠을 자다 꿈속에서도 재현되어 형이 내가 들고 있는 떡을 빼앗아 달아나니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은 상태에서 “내 떡 줘! 감자...감자..줘 내 감자 내놔” 식은땀과 함께 허언을 하니 부모님께서도 병적으로 홍역을 치루는 것으로 생각되어 매일 밤 준비했다가 자다가 깨서 울면 하나씩 쥐어주던 모정이 그리워진다.
이렇게 지난날 어렵고 참혹한 생활환경에서 주경야독을 하면서 (고교과정 3년과 졸업 후 서울에서 2년) 눈물 젖은 빵으로 겨우 청소년기를 보내다보니 영양이 고갈되어 성장이 멈추게 되어 지인이나 친지들로부터 나에 대한 별칭으로“괴물(怪物)”,또는 “분재(盆栽)”라는 호칭으로 회자되기도 하는 부끄러운 빈곤의 산물인 사연을 갖고 있기도 하다.
당시의 사정이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의 일이었으니 강산이 변해도 3번이나 변하여 한세대가 흘러가고 새로운 세대가 열리는 구획이니 타임머신을 타고 훌쩍 지옥과 천당을 배회하는 몽상의 흔적처럼 격세지감의 감회가 아련하다.
댓글목록
김정석님의 댓글
김정석 작성일
상남 친구의 글을 읽으니 어찌 그리 나의 소식적과 일맥상통 하는지
그래도 현제는 이렇게 떳떳하고 굽힘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지내고있네
황중창님의 댓글
황중창 작성일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라는 내용의 글 잘 읽었습니다.
그래도 어려움을 딛고 자수성가한 이상님에게 찬사를 보내며,
과거의 모든 어려움이 있었기에 현재의 행복지수가 더 높아졌
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성공의 인생을 엮어 가시기
바랍니다. 이상남님 화이팅!